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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VS 경주
 : 
일시 : 포천종합운동장
장소 : 2017.06.03(토) 15:00
 
    포천 : 경주
    포천1 : 0양평
    포천1 : 1화성
    포천0 : 1목포
    전주2 : 4포천
 
 
작성일 : 17-05-12 16:32
[심층인터뷰] 백혈병 이겨낸 전직 축구선수, 박사를 꿈꾸다
 글쓴이 : 축구단
조회 : 224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490&aid=00000…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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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한 씨는 K3리그 포천시민축구단 선수였다.


역경을 이겨내고 피어난 꽃은 가장 아름답다.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는 지금부터 시련을 이겨내고 제 2의 인생을 향해 달리고 있는 한 전직 축구 선수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 갑작스레 찾아온 시련
우석대학교 아동발달지원센터에서 책임연구원으로 근무 중인 오태한(34) 씨는 과거 오태환이라는 이름으로 뛰던 축구 선수였다. 모든 유망주들이 그랬듯이 오태한 씨도 프로 무대를 꿈꿨다. 대신고와 경희대를 거치면서 차근차근 성장해갔다.

현실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오태한 씨는 경희대 4학년 때 발목을 크게 다쳐 오랜 기간을 쉬게 됐다. 꿈에 그리던 프로 무대 입성을 목전에 두고 얻은 첫 번째 시련이었다. 드래프트를 포기한 그는 2007년 당시 내셔널리그 소속이었던 충주 험멜에 입단했고, 2년 뒤 공익근무요원 신분으로 K3리그 포천시민축구단에 갔다.

다행히 포천에서의 생활은 성공적이었다. 오태한 씨는 포천이 창단 첫 K3리그 우승을 차지한 2009년 MVP를 수상하며 관심을 모았다. 2010년에는 K3리그 팀 최초로 FA컵 32강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포천에 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힘든 날도 많았지만, 쉽게 할 수 없는 경험도 많이 했거든요. 기뻤던 일도 많았고요.”

하지만 2012년 1월, 두 번째 시련이 갑자기 찾아왔다. 백혈병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몸에 멍이 많이 들었어요. 멍이 안 들어도 될 위치에 멍이 생기길래 이상하게 생각했죠. 설 연휴가 지나고 장염 증상이 생기는 등 갑자기 몸 컨디션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에서 피 검사를 했는데 바늘을 꽂았다가 뺀 곳에 피가 멈추지 않았고 잇몸에도 피가 나는 거예요.”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오태한 씨는 곧장 병원을 찾았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신의 증상이 백혈병과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애써 부정했다. ‘아닐거야...’ 종합 병원에 서 골수 검사 등 각종 검사를 받은 오태한 씨에게 결국 청천 벽력같은 판정이 내려졌다. 백혈병이었다.

“병을 의심하는 것부터 최종적으로 병을 확인하기까지 이 모든 게 일주일 안에 나타난 거예요.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했죠. 가슴에 관을 꽂고 다녔어요. 약이 독하다보니 혈관으로 투입하다가 조금이라도 새게 되면 피부가 괴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6~7개월 정도 가슴 정맥에 줄이 꽂혀있는 상태로 다녔던 것 같아요.”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는 성실한 축구 선수에게 갑자기 찾아온 불행이었다. “그야말로 자괴감이 들었죠. 운동만 하면서 살았는데 왜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못해야 하는지...축구를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내가 살 수 있을지 없을지가 달렸던 문제였으니까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정말 힘들었죠.”


백혈병에서 차츰 회복하던 2012년 9월 오태한 씨의 모습


- 항암치료 4차, 약물치료 2년 반
항암치료는 오태한 씨에게 고통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구토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살은 급격히 빠지고 정신도 피폐해져 갔다. 본인의 고통이 제일 컸겠지만 가족들의 고통도 날로 커져갔다. 절망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오태한 씨는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들과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축구를 위해서다.

“병원에서 누워있으면 사람들이 제가 죽는 줄 알고, 혹은 평생 건강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았어요.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들더라고요.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치료에 성공해 운동장을 밟고 있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어요.”

오태한 씨의 의지에 하늘이 감동했을까? 항암치료 4차, 약물치료 2년 반 끝에 오태한 씨는 차츰 회복되어갔다. 이제는 재활이었다. 오태한 씨의 투병 생활 동안 포천 구단 측은 오 씨를 선수로 등록시키는 등 축구를 향한 그의 의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다시 뛰어야 할 이유가 여전했다. “2013년 1월부터 재활을 시작했어요. 근육은 이미 다 빠진 탓에 일반인들보다도 못한 신체 상태였다고 보면 돼요. 몸무게도 10킬로그램 이상 빠졌고요.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저도 힘들었지만 같이 했던 트레이너 형도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6개월 정도를 재활한 뒤 오태한 씨는 다시 포천 유니폼을 입었다. 2013시즌 11라운드에서 12분을 뛴 것을 시작으로 차츰 출전 시간을 늘려갔고, 23라운드부터는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 해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81분을 뛰며 팀의 우승에 보탬이 됐다. “기분이 좋았죠. 설레었고요. 백혈병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못할 건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다른 선수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거든요. 포천 이광덕 본부장님은 항암치료 할 때도 저를 선수로 등록해 경기장에 나올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고요. 동료 선수들과 당시 인창수 감독님도 많이 배려해주셨어요.”

오태한 씨는 2014년 K리그 챌린지에 진출한 충주 험멜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그를 믿고 지켜봐 준 충주 구단주 변석화 회장의 배려도 있었지만, 프로를 향한 꿈과 그의 철저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1년이 전부였다. “동계 훈련하면서 갈비뼈도 부러지고, 훈련량이 포천 시절과는 너무 달라서 적응하기 힘들었죠. 자꾸 삐끗하니 ‘이제 나도 할 만큼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년 있다가 바로 은퇴했어요.”


오스트리아에서 학회 발표 준비 중인 오태한 씨(왼쪽)의 모습


- 인내와 끈기로 공부하다
은퇴한 오태한 씨는 제 2의 인생으로 공부를 선택했다. 평소에도 축구 선수를 그만두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공부도 금전적인 부분과 시간 등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 하지만 재활 시절 트레이닝 센터에서 만난 아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우석대학교 스포츠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세부 전공은 유아특수체육이었다.

유아특수체육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제가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을 했잖아요. 이런 경험들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어요. 몸이 불편하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죠. 제가 아팠던 것처럼 아픈 아이들을 위해 공부하고, 제 경험을 전달하고 싶어 이쪽 길을 선택했어요.”

쉽지는 않다. 축구만 하던 오태한 씨에게 대학원 석사 과정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제가 공부에 뜻이 있지 않았더라면 논문을 그냥 썼겠죠. 졸업을 위한 논문이요. 하지만 공부에 뜻이 있다 보니 하나하나 자료를 찾고 연구하면서 논문을 썼어요. 쉽지는 않지만 재미는 있네요. 공부가 저랑 안 맞지는 않은 것 같아요.”

비결은 인내였다. 평소 끈기가 많고 잘 참는 성격이었던 오태한 씨가 석사 과정을 통과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운동은 동적이고, 공부는 정적이잖아요. 인내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걸 극복하고 인내하는 자세요. 무조건 참았죠. 오래 앉아 있으려고 했고요.”

지난해에는 오스트리아에 가서 학회 발표도 했다. “교수님의 지시로 학회 발표를 준비해야했죠. 6개월 동안 쓴 논문(스포츠활동 경험이 청소년의 심리적 소진과 회복탄력성에 미치는 영향)을 바탕으로 제가 발표해야 할 대본을 한글로 작성했어요. 이를 영어로 바꾼 뒤 다시 한글 발음으로 바꿔 달달 외웠죠. 15-20분 정도 분량이었거든요.”

“영어를 잘하냐고요? 잘 못해요. 핑계일 수도 있지만 공부할 시간이 없더라고요. 얼마 전에 토익 시험을 봤는데 200점 나왔거든요. 이 정도의 영어 실력인데 어떻게 영어로 발표를 할 수 있었겠어요? 인내를 가지고 무조건 외우는 수밖에 없어요. 당시 저는 제 동선 모든 곳에 원고를 놔두고 외웠던 것 같아요. 운전할 때도 음악을 트는 대신 녹음한 원고를 듣고, 핸드폰 배경에도 원고를 넣어서 보고 다녔죠.”

석사 과정을 졸업한 오태한 씨는 우석대학교 내 아동발달지원센터에서 3년 째 일하고 있다. 강의도 한다. 박사 과정은 서울 쪽 학교를 알아볼 예정이다. 주변에서 교수가 될 거냐는 질문들을 많이 했지만, 그는 신중했다.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자리에 가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현재로서는 ‘무엇이 목표다’라고 정확히 말하기 힘들어요. 교수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꾸준히 이 길을 가다 보면 뭐든 되어있겠죠.”

한 달 전에는 병이 5년 간 재발하지 않아 병원으로부터 공식적인 완치 판정도 받았다. “암 환자 리스트에서 완전히 빠졌다고 이제는 병원에서 할인을 못 받는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오태한 씨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축구는 그만뒀지만, 제 2의 인생이 행복한 이유다.


- 선택이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니라 마음가짐이 인생을 바꾼다
지난해 초에는 오태환(吳泰煥)에서 오태한(吳泰翰)으로 개명도 했다. 안 좋은 과거 때문에 이름을 바꾼 건 아니었다. 이름을 바꿀 정도로 자신의 과거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이름에서 ‘클 태’자에 있는 ‘물 수(水)’와 ‘빛날 환’자에 있는 ‘불 화(火)’가 부딪힌다고 하더라고요. 와이프가 제 인감도장을 파다가 발견한 사실이죠. 그래서 이래저래 맞춰보다가 발음이 비슷한 ‘한’으로 바꿨어요. ‘편지 한’자인데 날개라는 뜻도 있거든요. ‘큰 날개’죠. 바뀐 이름이요? 마음에 들어요. 역경이 왔을 때 더 멀리 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태한 씨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처럼 꾸준히 아픈 아이들을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며 행복하게 제 2의 인생을 그려나갈 예정이다. 그동안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트레이너 형들, 절 치료해준 의사 선생님, 가족, 와이프 등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이 자리를 통해 포천 이광덕 본부장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요. 바빠서 연락 잘 안하다고 서운해 하시는데, 사실 저는 포천의 경기 결과에 따라 주말의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사람이에요. 포천이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하루 종일 걱정되고...지금도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은 생각은 있긴 있어요. 본부장님이 절 받아줄지 모르겠지만요(웃음).”

일련의 시간들은 오태한 씨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한 때 전부였던 축구 선수의 꿈은 이제 떠나보냈지만,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대학교 때 부상을 당하고 프로에 대한 꿈을 접어야겠다고 느끼면서, 원래 하려던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저는 잠깐이나마 프로에 갔어요. 어떤 선택을 해도 제 인생은 크게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선택이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니고 과정, 제 마음가짐이 인생을 바꾸는 거라 생각해요.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도 이야기하거든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가 중요하다고요. 어떤 선택을 앞두고는 누구나 방황하고 고민하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완주=안기희
사진=대한축구협회, 포천시민축구단, 오태한 씨 제공

기사제공 대한축구협회